9장 '타자를 만날수 있을까'와 에필로그인 '콘텐츠 시대의 염증에 관하여'는 작가의 의견을 담고 있는데 이 두 챕터가 사실 제일 흥미로웠다. 공감이 되는 이야기가 많았다.
9장에서는 모두가 인터넷에 접속하게 되면서 오히려 타자를 만나는 것이 더 어려워 졌다고 이야기 한다. 예전에 제한된 사람들이 인터넷을 사용 할 때는 인터넷이 오히려 현실 세계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창구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정보량이 급격히 늘어나고 알고리즘의 우리가 무엇을 보는지 결정하기 시작하면서 정형화되고 틀에 박힌 것들만 우리는 보게 된다. 새로운 것들을 접하기 더 어려워졌다고 주장한다.
에필로그에서는 '콘텐츠'라는 용어에 대한 공허함을 지적한다. 콘텐츠는 모든것을 의미하면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오늘날 콘텐츠의 숫자는 많아졌지만 모든 것들이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지루함음 만성화 되었다.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콘텐츠는 비즈니스 용어였다. 예술 작품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콘텐츠를 소비한다는 것은 철저히 상업적 논리로 만들어 진 것들을 소비하는 것이었다.
> 소비될 만한 것은 유행, 트렌드, 니즈와 같은 갖가지 표현으로 불리지만, 이 표현들이 가진 요란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실체는 텅 비어 있다. - p.228
> 콘텐츠라는 명명 속에서 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공유의 메세지는 휘발된다. 콘텐츠라는 명명에 의해 일순간 작품은 마취총을 맞은 짐승처럼 양순해지고, 알고리즘 체계속에서 특정한 종류와 범주의 콘텐츠들 가운데 하나로 분류 된다. - p.228
>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오직 보이는 것만을 헤아린다. -p.228
흥미로운점은 이러한 현상이 AI로 인하여 컨텐츠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 두 줄의 문장으로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아마 더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틀에 박힌 것들을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다를 것 같지 않다.
책에 따르면 들뢰즈는 시네마에 현실을 송두리째 뒤바꿀 수 있는 역량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고 한다. 영화란 클리셰를 파열시키는 문제 제기이며 실험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고 있는 '새록'이 범람하는 소프트웨어, SNS들의 세상에서 클리셰를 깨는 시네마가 되길 희망한다.